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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으로 향하는 풍경

이주희 미술 평론가 (미술평단 2024년 여름호)

여행만큼 전 인류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콘텐츠가 존재할까. 그 여행이 짧든 길든 정적이든 동적이든 여행이라는 광범위한 상상력과 실현을 위해 현 시간에도 온 인류가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거기에 삶이 곧 여행이라는 선문답 같은 말로 여행의 의미를 다시금 확장한다면 여행은 현재의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상위의 긍정적이고 활력적인 개념이자 모든 인류의 선망과 열정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허필석은 여행 그림을 그린다. '갤러리 위(Gallery We)'에서 개최된 이번 <Travel to Nature Connection>전에는 넉넉한 풍경과 여정이 담긴 회화작업 30여 점이 출품됐다. 전시 제목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듯 출품작들에는 여행을 통해 자연을 만나고 자연의 풍광을 적극적으로 옮기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가 담겨있다. 곳곳의 풍경 속을 달리고 있는 빨간버스는 허필석의 작품에서 공통으로 찾아볼 수 있는 상징이다. 수 개의 짐가방을 트럭 상단에 적재한 채 곳곳의 길을 달리고 있는 빨간버스에선 속도감이 도드라지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렇기에 버스에 타고 있는 이들이 주변의 풍광을 즐기며 여유 있는 여행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여행 그림은 관람객의 시선이 머물기에 넉넉하면서도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데 편안한 대화가 오가고 있을 로드트립의 분위기가 화면 전반으로 이어지며 지난 나의 여행길에서 나누었던 대화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렇게 균질한 미감을 선사하며 여행으로 말미암은 공감과 활력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허필석의 작품이 지닌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탁 트인 화면 속 다양한 풍경에선 여행 중 작가가 직접 경험한 자연이거나 작가가 상상했을 자연의 계절감이 눈에 띈다. 여행에서 마주할 수 있는 것들 중에 계절이 있을 것이다. 계절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포함하는 것이자 외면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에 눈과 귀를 기울일수록 인간에게 보다 유용한 대답을 들려주었던 인류의 동반이기도 하다. 지평선 너머로부터 이어진 설원을 달려온 빨간버스는 풍요롭게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을 지나고 녹음이 우거진 산맥을 지나 갖가지 천연색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는 대지를 넘는다. 이처럼 다양한 계절이 내려앉은 길을 달려온 여행자는 계절과 함께 흘러가는 시공간을 목격하며 자신의 시공간 역시 들여다볼 수 있었을 것이다. 여행에서 마주할 수 있는 '나'라는 시공간에선 내 안의 또 다른 길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 길에 내려앉은 '나‘라는 계절을 마주하기도 하며 '평소의 나'라면 불가능한 것들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 이렇게 여행이라는 객관적인 현상 속에서 벌어지는 주관적인 경험이 우리들의 여행을 더욱 소중한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허필석의 화면은 광활한 풍경과 길 위를 달리고 있는 빨간버스로 서사가 집중된다. 화면 속 빨간버스는 원거리에서 근거리의 관람자 방향으로 다가오는 구도를 취하고 있기에 길고 긴 여행길을 지나 나에게로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나에게서 멀어져가는 풍경이 아닌 나에게로 다가오는 빨간버스는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으면서 동시에 관람객에게 빨간버스 운전자의 시선을 갖게 만든다. 허필석의 작업을 보며 관람객은 타인의 서사로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 서사를 들여다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신이 지나왔거나 앞으로 나아갈 여행길을 떠올리며 화면 속 풍경을 바라봄으로써 보이지 않는 풍경을 상상하고 여행의 정서를 환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허필석 작업의 또 다른 특징이다. 미술의 영역에서 구상회화가 이루어낸 업적이자 여전히 지니고 있는 끝없는 가능성 중 하나는 구상회화가 인간의 인지에 작용하고 끊임없이 이해를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인간에게 보이는 것을 넘어선 영역을 볼 수 있게 만들고 그곳으로 나아갈 수 있게끔 작용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보이지 않는 길을 그려내고 싶다"고 말한다. 그 역시 관람자의 인지에 작용하며 이해를 구하는 풍경을 그리면서도 빨간버스 운전자의 시선으로 새로운 풍경과 그곳으로 향하는 새로운 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시선에서 작가가 도달한 풍광들이 앞으로의 작업에서 더욱더 넓게 펼쳐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처럼 새로운 풍경과 길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대중화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관람, 휴양, 미식, 체험 등등 현재에는 수많은 여행의 컨셉트가 발명되고 널리 사용되지만 여행이 대중화되기 시작할 무렵 여행에 필수적이었던 요소들은 '자유'와 '여유', 그리고 '심미적 능력'과 '소양' 같은 것이었다. 가까운 과거 18세기의 영국에서 ‘그랜드 투어’(Continental Grand Tour)라는 개념이 탄생했을 때 당시 소수의 귀족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여행의 경험은 귀족을 지나 부유한 상류층과 부르주아 계급으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확장에는 유럽 전역으로 이어진 도로와 확장을 비롯한 물리적 환경 개선도 큰 역할을 했지만 무엇보다도 개인의 욕구 확장과 실현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던 사회적 흐름이 크게 작용했다. 신흥 귀족을 비롯한 상류층들은 당시 화가들의 그림에서만 볼 수 있었던 그림 같은 풍경과 타지역의 상징적인 건축물 나아가 유럽을 휩쓴 유명한 화가들의 명화를 직접 감상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가졌다. 이동의 자유와 미적 향유라는 큰 여유를 과시할 수 있었던 이러한 경험은 사회적인 신분의 명시와 함께 '그랜드 투어리스트'들에게 지적·정신적 만족감을 선사했다. 또한 그랜드 투어가 가지는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경험적이고 교육적인 상류층의 콘텐츠로 이해되었다. 

오늘날의 미술 관람 역시 그랜드 투어와 같은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원하는 곳으로의 이동을 즐기며 각 지역의 상징적인 건축물인 미술관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관람하는 일. 단번에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경험과 향유의 차원에서 지적·정신적 만족감을 가져도 좋은 콘텐츠로 미술 관람을 이해할 수 있다면 여전히 소수에게만 의미가 공유되고 있는 현대의 미술에도 한 발자국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파악의 연장에서 허필석의 화면을 감상하며 자신의 경험을 추억하고 나아가 타인과 여행의 기억을 공유하며 하나의 시공간을 향유할 수 있다면 예술 체험에서 나아간 보다 특별한 경험에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술이 여행과 공유하는 창의적인 동세와 일상적이지 않음에 대한 지향성은 미술과 여행을 향유하는 이들에게 보다 특별한 자유로움을 선사할 것이다.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조건에 얽매이지 않은 정서적 공간과 그곳에서 느낄 수 있는 쾌적함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겠다.

허필석 작가는 자신의 풍경에 대하여 "풍경은 내 안의 휴식과 같고, 또 다른 세계에 대한 희망"이라고 말한다. <Over There>라고 이름 붙은 작품명에서도 느껴지듯 작가는 풍경 너머의 풍경, 풍경 너머의 또 다른 세계, 화면 속 기나긴 길을 지나온 빨간버스가 향할 앞으로의 길을 바라보고 있다. 예술작품 역시 인류에게 여러 풍경을 바라보게 했고 또 다른 길을 열어주었다. 예술작품의 주제로 여행이 자주 다루어지는 이유 또한 안주할 수 있는 터전에서 나아가 풍경과 함께 생동하고 새로운 풍경을 향한 진취성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재하는 풍경을 꺼내며 휴식과도 같은 긍정적인 것을 산출해내는 회화. 인간의 진취성을 불러일으켜 풍경 너머의 길을 희망하게 하는 것이 허필석의 회화가 지닌 동력이라 할 수 있다.

바다로 가는 길...

허필석

나는 어릴 적 깊은 산골 작은 마을에서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앞뒤로 큰 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었기에 항상 ‘저 산 너머엔 뭐가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나름대로 여러 가지의 생각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지만 유독 떠나지 않는 그것은 저 너머엔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산 너머의 세계를 그저 상상만 해 볼 수밖에 없었다. 유년시절의 신기루와 같았던 것이다.

어느 날 높기만 하던 그 산을 드디어 가 본 것이다. 정상에서 내려 본 반대편은 똑같은 산들이 중첩이 되어 있을 뿐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아주 평범한 모습일 뿐이었다. 훗날 그곳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때 산에 오른 허무함과 동시에 그냥 그 기대감을 조금이라도 오래 간직할 걸 하는 아쉬움만 남았던 것이다. 분명 있어야 할 바다는 없고 끝없는 산봉우리들만 내 눈앞에서 겹쳐 보일 뿐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우리네 일상과도 같은 것이다. 끝없이 반복되는 현대인의 삶은 꿈이라는 이상을 볼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이다. 
 
수도 없는 실재풍경들을 그려 왔다. 앞으로도 그릴 것이다. 풍경은 내 안의 휴식과 같고, 또 다른 세계에 대한 희망인 셈이다. 그 풍경이 실재에서 잠깐 벗어나 이제는 내 자신의 구도로 그려 나간다. 마음의 길이고 풍광인 것이다. 길은 굽이굽이 끝없이 연결 되어지고 산과 들은 저 너머로 끝없이 중첩되어 진다. 그리하여 어릴 적 소년의 꿈은 하나씩 끄집어내어져 그 길에서 걸어가고 있다. 아니 보이지 않는 길을 그려내고 싶은 게다. 그리하여 그 작은 희망과 꿈을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바다를 그려낸다. 아주 간결하게... 

수많은 개인전을 통해 보여 진 내 작업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생각으로 일관 되어진다. 마치 반복되는 일상과 같이 똑같은 사이클이 되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언제까지 반복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인간 표현에 지칠 때쯤이면, 어김없이 풍경의 매력에 빠져 들고 그 속에서 또 다시 사람의 모습을 찾게 되고, 다시 자연으로 반복 되어진다. 

과거엔 자료(사진) 없이는 작업을 하지 못했다. 어떤 대상을 표현하기엔 참고할만한 그럴듯한 사진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사진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단순히 나의 표현력을 믿었던 건 아닐 것이다. 늘 내 머릿속엔 어린 시절 실루엣처럼 아련하게 남아있는 상상 속의 풍경에 집착되었고, 겉으로 보이지 않는 그것을 표현하려는 의지가 내 모든 자료를 무의미 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젠 형태와 색깔 모든 게 정해져 버린 사진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지금 나에겐 풍경화의 표현 욕구는 겉으로 보이는 자연의 탐닉에서 내 안에 감춰진 자연의 대상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손’의 표현기술력에 의존하고, 어떤 이는 예리한 ‘눈’을 통해 세상을 관찰하고 또 어떤 이는 ‘머리’를 통해서 대상을 해석 하려 한다. 하지만, 손과 눈과 머리 보다는 내 감성을 애절하게 표현하는 ‘가슴’으로 그리는 작가이고 싶다.” 

난 흔히들 말하는 구상작가다. 붓으로 물감을 풀어서 캔버스에 나의 구상능력을 살려 맛깔나게 그려가려고 노력하는 구상작가 말이다. 하지만 나의 작업은 정통적인 재료를 쓰지만 작업과정에선 정해진 순서는 없다. 흔히 우리가 배워왔고 알고 있는 방식을 취하진 않는다. 어떤 대상과 구도를 미리 정해놓지도 않는다. 흰 캔버스에 임의로 정한 부분부터 내가 쓰고 싶은 색으로 붓 끝에 힘을 실어 표현하고 그 다음에 대한 계산도 하지 않는다. 그저 표현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따라 갈 뿐이다. 그 붓질에서 나타난 형상과 색은 때론 바다가 되고 하늘이 되고 산이 되고 나무가 된다. 그리고 그 위로 버스가 달려온다.

내 그림을 편하게 봐주길 바란다. 지금 내 보이는 그림은 미술사적 대안이나 거대담론을 가진 작업은 아니다. 그저 유년시절 그토록 갈망했었던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신기루를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 신기루는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꿈속에서 가끔씩 마주하게 되지만, 어김없이 일상으로 돌아와 보면 첩첩산중이다. 오늘도 붓을 부여잡고 저산 너머엔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그리고 있다. 나를 그리고 있다.